개항이 치욕의 역사? “타율적이지만 주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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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초대안 댓글 0건 조회 31회 작성일 26-05-10 21:41본문
동대문구입주청소 개항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텐데.
전: 물론 수많은 부침과 위기의 순간이 있었으나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한반도로 유입되는 근대 문물의 과반이 부산항을 거쳤다. 이후 하늘길(항공)이 열렸고,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으로 교류의 영역이 확장됐다지만, 대규모 물자 통로인 부산항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하다. 최소 100년 이상 부산항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질적 인적·지적 교류가 불가능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부산항은 대한민국의 혈맥과도 같은 곳이다.
강: 부산항 개항 이전까지 한반도는 중국이 주관하는 동아시아 질서 아래 놓여 있었다. 조선의 국왕조차 중국의 승인 없이는 권위를 온전히 세우기 어려운 구조였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이러한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 길을 걷기 시작한 역사적 분기점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1875년 운요호사건을 언급하며 일제의 총칼에 의해 강제적으로 문을 연 ‘치욕의 역사’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을 냉정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강: 운요호사건 당시 전사한 조선군은 30여 명 수준이었다. 이보다 앞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과의 교전으로 300여 명이 죽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두고서는 크게 분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강화도조약에 불평등조약으로 볼만한 내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패배주의적 시각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전: 개항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강제 병합으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역사 인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 결과 식민 지배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일본의 침략성을 강조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 과정에서 ‘세계정세에 어두웠던 어수룩한 조선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이용당했다’는 시각이 거부감 없이 수용됐다. 사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일본이 가장 원하던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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